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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Passengers

by 랜디 로즈 2020. 5. 20.

잡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100문 100답 설문조사에는 ‘만약 세상에 혼자 남게 된다면?’ 이라는 항목이 가끔 등장합니다. 고독을 즐기는 외로운 늑대이거나 또는 심각한 중2병을 앓고 있는 환자라면 ‘어이쿠 세상에 나 혼자뿐이라니 이보다 더 기쁜일이 어디 있겠는가’ 할 지 모르지만, 실제로 나온 가장 많은 답은 ‘처음에 이것 저것 해 보다가 결국은 외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시들어 죽겠지’ 였다고 합니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다’같은 좋은 말들이 많지만, 그 사회적이라는 것의 함의가 예전과는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인터넷이 등장하고 게임이 등장하고 덕후니 히키코모리니 하는 단어들에 익숙해지면서 ‘문명의 발달로 사람들 사이의 물리적인 거리는 줄어들지만 심리적인 거리는 더욱 멀어지게 되어’ 인간은 결국은 혼자가 될 것이다라는 말들도 흔히 들을 수 있습니다. 십 몇년 전의 에반게리온 광풍 역시 이런 비슷한 이유에 기반한 것이었고, 그 기저에는 중2병(!)이 있습니다.

 

실제로 사람이 세상에 혼자 남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이는 광활한 인터넷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지만, 아무리 멋진 글을 써 봐야 댓글을 달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과 비슷한 경우라 할 수 있습니다. 악플보다 무서운게 무플이라고 하는데, 사람들이 내 글에 무관심한 게 아니라 관심 가져줄 사람이 아예 없는 경우라는 거지요. 몇몇 사이트의 하드 유저들에게는 자다가 벌떡 일어날 무서운 소리가 될 겁니다. 시간이 흐르고 문명이 발전하여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회가 되어 실제 세계에서 만나지 않고 컴퓨터 또는 스마트 폰으로만 대화하는 사회가 되었다고 하고 은둔형 외톨이가 사회 문제가 되고 있지만, 온라인으로 대화를 하건 게시판에 댓글을 달건 좋아요 버튼을 누르건 간에 사람은 어떤 형태로는 다른 누군가와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세상에 모든 사람이 다 사라지고 나 혼자 남았다고 생각해봅시다. 전쟁이나 외계인 침공, 또는 좀비 사태로 인류가 멸망한 것이 아니고 어느날 아침 눈을 떠보니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는 겁니다. 세상 모든 것은 그대로이고, 전등은 잘 켜지고 수돗물도 잘 나오며, 심지어 인터넷까지 되고 먹을 것도 많은데 오직 사람만 없는 겁니다. 운전도 할 수 있고 주유소에서 주유도 할 수 있고 놀이공원에도 갈 수 있으며 영화도 볼 수 있고 책도 읽을 수 있습니다. 세상 모든 건 이전과 같은데, 오직 하나 다른건 세상에 나 혼자만 존재하는 겁니다. 그리고 평생 먹을 것이 종류별로 다양하게 준비되어 있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아도 굶어죽기는 커녕 평소 먹고싶었던 것을 마음것 먹을 수 있는 상황인 경우입니다. 개인 성향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마 처음엔 꽤 신날겁니다. 못해본 것, 하고 싶었던 것들 실컷 해 볼 수 있으니까요. 혼자서 해외여행을 가지는 못하겠지만, 해보고 싶었지만 못 해보았던 모든 것들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서울 정도에 살고 있었다면 세상 부러울 것 없는 생활을 할 수 있을 겁니다. 처음 몇 개월에서 길면 몇 년간은. 그러다 점점 지치게 될 겁니다. 혼자서 뭔가를 하는데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2~3년 지났다면 영화도 볼 만큼 보았을테고 먹고 싶은 것도 먹을 만큼 먹었을 겁니다. 그 상황에서 가장 그리운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사람일 겁니다. 남자일 경우라면 아름다운 여성이 가장 그립겠죠. 그러다가 정말로 아름다운 여성과 단 둘이 세상에 남게 되었다면? 패신저스는 이 상황이 거대한 우주선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가까운 혹은 먼 미래에, 주인공 짐 프레스턴은 동면중인 상태로 우주 식민지 개척회사 홈스테드 컴퍼니의 초호화 우주 여객선 홈스테드 2 를 타고 5000명의 승객과 258명의 승무원과 함께 벅티 은하계의 네번째 행성인 홈스테드 2 행성을 향해 30년째 빛의 절반의 속도로 우주를 달리고 있습니다. 정비공이 직업인 짐은 90년을 더 날아 홈스테드 2에 도착해 새로운 친구와 함께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될 예정입니다.

 

우주항해 중 운석과 충돌하여 몇 가지 사소한 고장이 발생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사소한 고장에 짐 프레스턴의 동면장치가 포함되어 있었다는 입니다. 고장으로 인해 혼자 동면에서 깨게 되고, 다시 동면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이나 여분의 동면 장치는 없습니다. 짐은 홈스테드 2 행성에 도착할 때까지 90년간 혼자 살다가 쓸쓸이 늙어 죽을 운명에 처하게 됩니다. 처음에 짐은 호화 우주선의 갖가지 럭셔리한 편의시설들을 혼자 즐기지만, 곧 외로워집니다. 자살을 시도하던 날 짐은 오로라의 존재를 알게되고, 해서는 안될 일을 행동에 옮기게 됩니다.

 

딱 봐도 최첨단 호화 우주선인 홈스테드 2호가 우주를 날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영화는 누가봐도  명백히 SF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는 짐이 동면에서 깨어나는 장면에서 부터 그 어떤 장르라도 될 수 있습니다. 짐이 싸이코가 되어 동면중인 사람을 하나씩 죽이는 싸이코 드라마가 될 수도 있고, 홈스테드 2의 동면포드에서 잠을 잔다는 것은 사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되는 것이었더라.. 등의 심령학적 문제가 발견되는 이벤트 호라이즌 같은 SF 공포 영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짐 혼자서 90년을 생존하는 캐스트 어웨이 같은 휴먼 드라마가 될 수도 있고 갖은 난관을 해치고 홈스테드 2 행성에 가까스로 도달하는 어드벤처가 될 수도 있으며, 고장난 우주선이 폭발하기전 승객을 살리고 자신을 희생하는 숭고한 히어로 영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존재와 실존에 관한 이야기부터, 영혼이 없는 존재인 안드로이드 로봇과 인간이 유대관계가 가능하느냐는 SF 철학 영화가 될 수도 있고 미지의 존재를 만나는 클로즈 인카운터나 얼라이브 같은 영화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영화는 SF 어드벤처와 SF 로맨스를 엮는 가장 안전한 길을 택합니다. 짐은 오로라와 사랑에 빠지고, 들통난 비밀로 인해 난관에 봉착하고 나아가 더 큰 난관에 봉착하지만 천성이 착한 짐의 희생으로 모든 난관이 해결되고, 오로라와 5000명 승객의 목숨을 구한 짐은 저지른 범죄에 대한 면죄부를 받으며 오로라의 사랑을 다시 쟁취합니다. 그리고 90년 후 홈스테드 2 행성에 도착할 때 까지 짐과 오로라는 호화 럭셔리 우주선에서 나무 키우며 잘먹고 잘 살았더라는 전형적인 SF 로맨스 영화로 끝을 맺습니다.

 

이 영화의 감독 모튼 틸덤의 전작은 베네틱트 컴버배치와 키이라 나이틀리가 출연한 <이미테이션 게임>입니다. 두 영화는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미테이션 게임>의 무대는 2차 대전입니다. 2차 대전을 배경으로 앨런 튜링이 여성 수학자 조안의 도움을 받아 암호 해석 기계를 발명하는 이 영화는  앨런과 조안 사이의 미묘한 감정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큰 축이 됩니다. 동성애자 였던 튜링과 조안의 사랑이 이루어질리는 없지만, 튜링이 조안을 선택하고 이끌어 가는 과정과 중간 중간에 생기는 둘 간의 갈등, 튜링을 끝까지 돕는 조안등 둘 사이의 관계는 이 영화의 두 남녀의 관계와 미묘하게 오버랩 됩니다. 큰 사건간에서 진행되는 남녀간의 스토리를 훌륭히 엮어 냈다는 것만으로도 볼 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갓 스타가 되던 시점의 크리스 프렛과 이미 아카데미를 수상한 적 있는 제니퍼 로렌스의 연기는 나무랄데 없이 괜찮으며, 매트릭스에서 네오의 엄격한 멘토였던 로렌스 피시번은 딱 맞는 역할을 맡아 좋은 연기를 보여줍니다.

 

이 영화의 스토리에 대해 트집을 잡자면 끝이 없을 것입니다. 왜 아서는 도착 90년 전에 동작하고 있었는지? 모두가 자고 있을 때 지나가게 되는 악튜러스 항성에서의 슬링샷에 대해 왜 안내방송을 하는지? 등등 SF 적으로 따지고 들자면 끝이 없을 만큼 허점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허점들이 영화의 몰입에 방해될 정도는 아닙니다. 악튜러스 항성에서의 슬링샷 장면은 왜 안내방송을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정도의 압도적인 영상미를 보여주며, 그 큰 우주선에 당직 사관이 없다는 점이나 예비 동면 장치가 없다는 점은 영화의 스토리를 위한 장치로 이해하고 넘어갈 만 합니다.

 

<캐스트 어웨이>에서 톰 행크스가 표류해서 도착한 섬이 아무도 없는 하와이 였고, 1년 후 앤 해서웨이나 제니퍼 애니스톤이 같은 섬에 표류해와서 사랑에 빠지게 되고 탈출기회가 있었음에도 둘이서만 섬에서 영원히 살기로 맹세하며 영화가 끝맺는다면? <패신저스>가 될 것입니다. 

 

사족) 이 영화는 키아누 리브스와 레이첼 맥아담스를 염두에 두고 계획되었다고 합니다. 두 배우를 기용했다면 SF 버전의 <Lake House>가 되었을 것 같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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